퇴직 단상 / 김정진 경우

관리자입력 2024-05-09 13:10(업데이트 : 2024-05-09 13:10)

 

경찰생활 30여년을 넘게한 직장생활은 즐겁고 기쁜 일보다는 힘들고 어렵고 위험스러웠던 일들로 숨가쁘게 지나간 듯 하다.


첫 출근시 생기발랄하고 뜨겁게 차오르던 일에 대한 열정은 어느새 흐른 세월만큼이나 덧없이 지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볼품이 없어지고 반백이 되었다.


대부분 직장인들은 정년퇴직을 하면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아야지! 못 가본 여행이라도 떠나야지! 실컷 잠도 자봐야지! 파란 신호등이 켜지는 곳으로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야지!... 등등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우고 퇴직을 한다.

 

오랜 세월 직장 생활에 지친 가장이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는 물론 어느새 성년이 되어버린 아이들도 그동안 너무 수고 많았다며 여행도 떠나고 편하게 쉬면서 멋지게 인생 2막을 살아보라고 한다.


그렇게 가족의 용기를 얻어 가보지 못했던 남도여행도 홀로 떠나보고 바빠서 오르지 못한 집 근처 산 정상에도 올라 시원한 공기도 맞이하고 조금 돈을 더들여 해외여행도 떠나보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이 몇 달을 지내다 보니 갑자기 단절된 사회생활은 어색하기만 하고 어느새 거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리모콘을 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인생의 회한이 엄습해 오게 마련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편하게 지내라 하던 가족들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함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30년넘게 다람쥐쳇바퀴 돌 듯이 직장에서 만일하고 대화하고 회식하며 놀다가 갑자기 들어와 한구석을 차지하며 놀려고 하니 가족들과 대화하는 방법도 잊어버려 서먹서먹해지기 때문이다



’육십은 젊은 청춘이니 인생은 육십부터, 칠십까지는 일을해야 한다, 시니어들의 취업난, 쉬지않고 일하는 한국사람들‘등등 우리 사회는 퇴직을 하였어도 자꾸만 일터로 내모는 느낌이다. 그러기에 허드렛일이라도 찾아 보려고 일찍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소침한 모습으로 집을 나와 구직 센터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자치단체에서 모집하는 기간제 근로에 도전해 보지만 ’연금을 타는 사람이 왜 이런데 지원을 하느냐?‘ 이런 곳은  장애인 가족이나 다문화가정, 기초생활수급자가 우선이다며 공무원 출신은 열외이기 일쑤다.


퇴직전 직장에서 제공하는 은퇴후 생활설계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강사들은 한결같이 퇴직후에도 일을 하려면 자격증이 반드시 필요하니 준비해 야 한다는 충고에 전기기사, 소방설비, 지게차, 대형면허,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 주택관리사 등등 뒤늦게 머리 싸메며 공부해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정작 육십을 넘긴 지원자들은 극소수만 취업에 성공할뿐 사업장에서는 대부분 젊은층을 선호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 시골에서 농사, 어업을 하는 사람,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등은 은퇴후에도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지만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소일거리를 찾지 못해 가족과 마찰을 빚으면서 은퇴후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러기에 경비원이라도 해보려고 지원하지만 고령사회에 그도 만만치 않다.


퇴직호 주변에 놀고있는 친구들도 없을뿐더러 건강한 사람이 무료하게 집에 있는게 싫어지고 고물가 시대에 연금만으로는 도시생활이 어렵고 아이들 결혼자금도 걱정이 되어 건강도 지키고 한 푼이라도 가정에 보탬이 되고자 일자리를 찾지만 쉽지않은 일이다


그러기에 퇴직전 진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자격증을 발굴해 꾸준히 연습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직장이지만 가족들과 대화하며 식사하고 여행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본다.


퇴직단상 글이 다소 허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은 어두운 글이지만 대다수의 퇴직자들이 겪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했지만 하늘이 아름다운 건 구름이 흘러 그림을 그리거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있기 때문이고 땅이 아름다운 건 빈들에 피어나는 들꽃 때문이듯 당신도 가족이라는 틀 어디에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오늘 부터라도 준비해보자.


관련기사

그리운 아버지께 ! / - 공비들과 교전 중 장렬히 산화하신 아버지를 그리며(유대지 경찰유자녀회장) -
그리운 아버지, 편히 쉬세요!   꿈에도 잊지 못할 나의 아버지!   얼굴도 한번 뵌적 없고, 그 넓은 가슴에도 안겨 본 적이 없으며,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도 없는 소자가 꿈속의 아버지께 엎드려 큰절 올립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지난 1949년 3월 23일, 건국경찰로서 경상북도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재직하시던 중, 직원 두 명과 관내를 순찰하셨습니다.   아버지 일행이 순찰중 산골 오두막 초가집에서 직원들과 방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셨지요.   그때 집주인은 이미 인근 공비 일당들에게 연락하여, 공비 20여명과 교전 중에, 조국의 꽃으로 장렬히 산화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급보로 접수한 인근 군경 합동 토벌대는, 이들과 교전해 궤멸시켜 안강 면민들의 안위를 사수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경찰 전사에는 아직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소자가 반드시 이 사실을 밝혀 영전에 바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전사하실 때, 소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일개월도 채 안된 상태였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울산에서 그 비보를 접하시고, 안강지서에 갔으나...   이미 아버지와 직원 두명 시신 3구가 노상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후손이 없다는 담당 책임자의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노상화장을 승낙하셨습니다.   아! 그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안강 면민도 울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어머니께서 기절하셨고, 인근 병원에서 진찰해 본 결과, 소자가 잉태되어 있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아버지 장례를 치르신 후, 슬픔에 빠진 할머니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후 시간이 흘러 제가 태어났지요.   그날이 음력으로 1949년 9월 28일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안 계신 저의 가문이 겪은 파란만장한 고초를 어찌 다 말씀드리겠습니까?   어머니께서도 제가 두살때 돌아가시니, 저는 할머니 슬하에서 호로자식이라는 당시 우체국장 아저씨의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유서 깊은 명문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시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1971년 4월 9일 축하객들이 함께 한 가운데, 옛풍습으로 아버지의 귀여운 며느리를 맞이하여, 따뜻한 봄날 혼례를 치렀습니다.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며느리는 할머니께 눈물로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22살때였지요,   그날 좋아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제 제 나이 이제 75세. 아버지 며느리가 76세고요,   네 명의 딸들이 모두 출가하여, 사위랑 슬하에 2남 4녀의 귀여운 외손녀가 건강하게, 성남 우리 집주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란의 대한민국을 구하시고 장렬히 산화하신 아버지의 빛나는 구국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소자가 반드시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아 부끄럽지 않은 가문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두 분 고모님이랑 부디 편히 쉬십시오.    
관리자2025-01-23 14:26